“답이 없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집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히키코모리들이라도 된걸까요? 하지만 답은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이 제자들이 성령을 받더니 비로소 선포활동을 시작합니다. 지난 복음들을 통해 주님이 지시하신 명은 “세상 끝까지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드디어 알려 주십니다. “죄를 용서해라.” 사도들, 사제들,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세상 끝까지 가서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이 사명에 대해 한번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세상 끝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경남에는 경호강을 끼고 있는 산청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성심원이라는 곳에는 나환우들이 모여서 사는, 제가 속했던 수도회 형제들이 관리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20여년 전 이 곳에서 한 달간 봉사를 했습니다.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그 마을을 한 번 돌아보려고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오늘날에는 사용하지 않는 낡은 나루터에 걸터 앉아 계신 나환우 네 명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조용히 함께 앉아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젊은 시절, 나병이라는 재앙에 눈, 손가락, 발가락을 잃었던 이들의 뒷모습이었습니다. 흉칙한 모습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버림받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돌도 맞아가면서, 그래서 밤에만 나와서 어떻게든 끼니를 해결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며 도망치다 그 마을로 들어와 다시는 나가지 않는 이들의 뒷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십년 전에 경호강을 건너 와 이제는 자신들을 버린 강 건너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요? 어쩌면 이분들이 걸터 앉은 그 나루터가 바로 그 세상의 끝이 아닐까 싶습니다.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법원 앞 화단에서 건설노동자 한 명이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그곳에는 금방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자리에 흙이 덮이더니 어느새 말끔히 정리가 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정리가 된 화단에 들어가 그 장소를 헤쳐보던 중에 까맣게 탄 명찰을 가져다 부은 흙 밑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명찰에는 “양희동”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리인데, 얼마나 대충 정리했으면 고인의 명찰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도 잔인하지만, 그 죽음에 이렇게까지 무관심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잔인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명찰 위에 적힌 고인의 이름 석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원망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양희동씨도 세상의 끝에 서 계셨던 겁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20%만 물과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희는 그것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충분히, 원하는 만큼 사용합니다. 게다가 웬만한 가정에는 화장실 두 개가 있습니다. 저도 혼자 살지만 화장실을 두 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수준이 과연 일반적인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통계는 우리가 세상 한 가운데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몇 명이나 5주 동안 휴가를 갈 수 있고, 끼니를 걱정하기 보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돈이 없어서 걱정하기 보다는 돈이 생각보다 빨리 모이지 않아서 고민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우리의 고민을 이렇게 어려운 이들에게 얘기한다면, 이들은 우리에게 왜 그런것들이 고민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 모두는 세상 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저 끝에 서 있는 이들은 지저분해 보이고, 시끄럽고, 귀찮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입에 제갈을 물리고 조용히 하라고, 또 법대로 하라고 요구합니다. 정의와 공정 모르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다가가라고 거듭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가서 “죄를 용서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죄를 용서한다는 것,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죄를 용서하는 것은 저희들을 역할이자 여러분들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백성사를 듣습니다. 또 여러분도 비슷한 방식으로 죄를 용서합니다. 아이가 잘못한 것을 엄마에게 얘기하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죄를 용서합니다. 그런데 이 때 사제도, 또 어머니도 제일 먼저 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바로 듣는 겁니다. 잘 듣는 것에서 용서가 시작됩니다.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쟁이들입니다. 이들은 손님이 들어오면 뭐 때문에 왔는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먼저 듣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정동에 명도원이라는 학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외국 신부님, 수녀님들이 먼저 언어를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목현장으로 파견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세상 끝까지 가서 죄를 용서하라는 것은, 삶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라는 게 아닐까요? 뭘 특별한 걸 주라는 것도, 돌봐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듣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상상해 봅니다. 만약 공권력이 양희동 (미카엘) 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공갈 혐의로 구속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물어봤다면, 과연 그가 분신을 하셨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성령이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실 일은, 죄를 용서하시고 은사를 주시기 전에 가장 먼저 하실 일은, 아마도 듣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다음 말씀하시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용서해 주실 겁니다. 점점 시끄러워지는 이 세상에서, 관종들이 쉴세 없이 번식하는 오늘날, 경청할 수 있는 은사를 이 성령강림절에 성령님께 청합니다. 아멘.

3분교리 >

성령칠은을 들어보셨나요? 칠성사나 덕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셨지만, 성령칠은은 별로 못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첫번째로, 슬기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시야가 넓어지고 활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통달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은사가 통달입니다. 통달한 사람은 사물을 깊이 인식할 수 있죠. 세번째 은사가 의견입니다. 네번째 은사가 지식입니다. 지식이 풍부하면 굳세집니다. 다섯번째 은사가 굳셈입니다. 굳센 사람은 더 큰 강한 사람에게 굽히는 효경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섯번째 은사가 효경입니다. 그리고 이 효경과 겸손을 넘어서서 경외가 가능해집니다. 일곱번째 은사가 경외입니다. 약간 다른 번역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성령칠은을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오늘이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교회의 생일이지요. 가톨릭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성심원에서 일하시는 스페인 신부님 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