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레아로 보내신 이유가 오늘 복음을 통해 비로소 드러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단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들이 티베리아 호숫가에 모여 있다고 전합니다. 이방인은 갈릴레아 호수를 티베리아 호수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호수를 갈릴레아 호수라고 불렀습니다. 갈릴레아로 온 겁니다. 구글 지도로 따지자면 약 150킬로미터를 걸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왔기는 왔는데 무엇을 하고 있나요? 최소 일곱 명의 사도들이 그냥 모여 있습니다. 그러다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합니다. 할 일도 없으니, 더 짜증나기 전에 그냥 나가보겠다는 말투로 들립니다. 여기에 다른 사도들이 호응합니다. “우리도 함께 가겠소.” 같은 심정인 겁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지긋지긋해서 나오기는 나왔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 없는 겁니다. 아침까지 그렇게 허탕을 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제자들이 다시 그물을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4장 20절은 전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렇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버렸던 것이 바로 그들에게 생계 수단이었던 그물입니다. 이상은 무너지고 일상으로 돌아와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다시 어부가 된 겁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사람을 낚던 이들이 다시 물고기를 낚는 겁니다. 영광과 명예는 사라지고 초라한 배반자로 생계나 다시 유지하려는 모습입니다. 차마 가족들에게 가지는 못하고, 거창한 모습으로 뛰쳐나가더니 갑자기 왜 그런 몰골로 다시 돌아왔느냐는 구사리를 견딜 수 있는 자존감도 없으니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겁니다. 출가가 ‘가출’이 된 상황입니다.

이렇게 최후의 만찬 후 배반자요 도망자로 살았던 제자들은 이제 고향 갈릴레아에서 완전한 루저(loser)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고 알고 있는 그곳에서 패배자로 살아야 하는 삶, 얼마나 비참할까요? 바로 이런 패배의 삶을 맛보도록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레아로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미래가 결정되는 때입니다. 죽거나 다시 태어나야 하니까요.

사제나 수도자로 살다가 환속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요? 예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항상 꼬리표가 뒤에 붙습니다. 갈릴레아에 있는 제자들과 이분들의 상황이 비슷해 보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 봅시다. 주임신부를 하시다 환속하신 어떤 신부님이 택시기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손님을 태웠는데 알고보니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말은 하지 않고 뒷자석에 그냥 앉아 계십니다. 이 때 택시기사에게 과연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차를 세우고 주님께 내릴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같이 있을 때 너무 힘들었고 환속한 후에도 당신 때문에 이런 저런 얘기를 들으니 지긋지긋 하다면서 말입니다. 다른 선택지는 차를 세우고 과감하게 본인이 내리는 겁니다. 그렇게 택시를 버리고 다시 성직자로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을 듣자 호수로 뛰어들었듯 말입니다. 그 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멋지게 사도로서 살아갔듯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저 밑바닥의 삶이 꼭 비참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겁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실패한 삶은 결코 비참하지 않습니다. 정말 비참한 삶은 어쩌면 우리들의 삶일 수 있습니다. 타고 있는 배 밖에 펼쳐진 차갑고 아득한 호수로 과감히 뛰어들게 해 줄 수 있는 그 고귀한 무엇을 발견하지 못한 삶 말입니다. 이 배에서 뭍으로 헤엄쳐 갈 동기를 찾지 못한 채 고기나 낚고 있는 삶 말입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다면 실수로 물 속에 빠져도 헤엄칠 이유가 없습니다. 뭍에 닿아도 기다리는 이 없으니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리 없습니다. 그러다 그냥 가라앉겠지요. 여러분은 과연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꺼이 닿고 싶은 그런 고귀한 존재를 찾으셨나요? 제자들은 저 밑바닥까지 가서 그런 존재를 찾았습니다. 반면 세상은 저 높은 곳에서 화려하게 살면서, 비싼 요트를 타고 있으면서 그 고귀한 존재를 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가 더 비참한 겁니다. 아멘.

강론 후 미사 중 메세지 >

인생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순간들이 항상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순간’ 자체가 아니고 이 ‘어려운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우리의 착각, 우리의 상상속에서 펼쳐지는 부정적인 시나리오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찾아올 때 이 상황에만 몰두하고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먼 곳을 바라보십시오. 차갑고 검은 물을 너머 뭍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멀리 바라보기 위해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인 사도요한은 고기잡이 배에서 뭍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그 분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아멘.

아가페 전 3분 교리 >

오늘은 상식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는 사제로서 일을 하지 않고 사회적 결혼을 해도 계속해서 사제일까요? 네. 사제라는 신분은 유지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미사 집전은 안됩니다.) 네. 특별한 조건 하에서 가능합니다. 실제로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가 되는 동시에 주교님께서 결혼할 권리를 박탈하십니다. 그러나 사제가 결혼을 한 후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교님께 간청을 하고 주교님께서 허락을 하시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