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저녁에 양파를 썰면서 성목요일에 어떤 강론을 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어느 날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특별한 것을 보여줄테니 학교가 끝나고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어떠 아파트단지 놀이터였습니다. 그 놀이터는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친구가 저를 한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아래를 내려다 보라고 하더군요. 그곳에는 한 수용시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다니는 게 보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이 정신지체를 겪는 사람들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묻더군요. “쟤네들 웃기지?” 제가 대답했습니다. “어, 웃겨”. 이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제가 열 세살 나이에 괴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35년 전의 일을 주님이 되새겨 주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제자들도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부활을 전하는 복음의 기사들은 한결같이 헐레벌떡 달리고 놀라는 이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달려갔을까요? 아마도 뉘우치는 마음으로, 후회하는 마음으로 달려갔을 겁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을 겁니다. 철저히 주님을 배신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시신까지 잃어버린 겁니다. 유대교 문화 안에서 이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정도의 수치입니다. 여러분도 지난 사순시기를 절제와 극기, 통회하며 보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숨차게 달려오셨는지요? 바로 제자들처럼 뉘우치는 마음으로 달려왔기에 이제는 주님의 무덤에 들어가 신앙을 굳건히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죄를 뉘우치며 숨가쁘게 달려온 이들에게는 신앙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과연 무덤에 와야 했던 걸까요? 어제 파스카 성야 미사에 읽은 마태오 복음(28,1-10)에서 주님의 천사는, 또 주님께서는 직접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제자들을 갈릴레아로 보내라고 명하십니다. 또 그곳에서 당신을 “보게 될 거라”는 것도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갈릴레아가 아니라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흔적을 보고 그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주님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갈릴레아가 아닌 무덤으로 달려갔으니까요. 제자들은 죄를 반성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이들이 주님이 명에 순종해 갈릴레아로 갔다면 그곳에서 주님을 뵐 수 있었을 겁니다.

달리는 행위 즉 극기, 고난, 죄의 뉘우침은 우리에게 신앙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주님에 대한 순종은, 그분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과의 만남(지복직관)으로 인도해 줍니다. 심장이 뛰도록 달리면 신앙에 이르고, 그 의지를 가라 앉히면 주님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극기와 뉘우침은 중요하지만 비로소 주님에 대한 순종 안에서 이 모든 것은 의미를 얻게 됩니다. 시간이 지난 후 제자들은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갈릴레아로 갑니다. 물론 그곳에 가서도 계속 엉뚱한 행동들을 합니다.

인류의 수많은 전설과 신화들, 문학과 사상 같은 거대담론들은 계략과 폭력을 통해 질서에 도달한다고 믿고, 또 그것을 멋지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리야드, 헤라클레스, 삼국지, 오늘날 왕좌의 게임 등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힘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로 올라가십니다. 순종을 통해 부활하신 후 여인들에게 평안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폭력과 힘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시대는 그 날 골고타 언덕에서처럼 여전히 주님을 향해 어서 내려오라고 외칩니다. 그 고통과 순종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우리들은 고통이 없는 종교를 원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또 주님을 향해 다른 사람들을 구했으면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물에 뛰어든 어머니가 어떻게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나라를 구하려는 군인이 어떻게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이 여전히 혼란한 것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뉘우침과 순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을 믿고 십자가에서 내려갈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달려갑시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장소로 달려갑시다. 각자의 갈릴레아로 말입니다. 제자들처럼 여러분이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 여정을 나선 그 장소 말입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잊었다면 앞으로 오실 성령님께 길을 물으시면 됩니다. 아멘.

3분교리>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어린이 한명이 1주일 뒤에 첫 영성체를 하고 앞으로 복사를 합니다.

오늘 성당 단톡방에서 유튜브 비디오를 보내드렸는데요. 부활절을 맞아 12시에 교황님이 Urbi et Orbi라는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교황님이 축복을 해주시는 일은 매해 두번 크리스마스와 부활에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교황님이 선출되셨을 때도 축복을 하십니다. 교황님 선출되신 전날에는 베드로 대성전 우측 집무실에서 축복을 해주십니다. 부활절에는 광장을 바라보며 집무실에서 하는 게 아니고, 베드로 대성전 정문 위쪽에서 베푸십니다.

간단하게 이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Urbi는 도시, Orbi는 지구, 전체, 세상을 의미합니다.

라테라노 대성당이 4세기에 로마 한구석에 세워졌는데, 왜 구석에 세워졌을까요? 로마 중심지에 다른 이교도의 성전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 성당에 이 문구(Urbis et Orbis)가 씌여 있었습니다.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리고 13세기부터 이 문구를 가져와서 교황님이 특별한 기도를 해주십니다.

오늘부터 부활 8부 축제가 시작됩니다. 기뻐하고 즐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