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

행복은 기원전 5세기 이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그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2500년간 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플라톤 역시 인간은 행복을 이뤄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 안에는 우연과 운명 등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하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을 했는데도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잔혹한 운명, Schicksal입니다.

우리는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을 할 뿐이고, 통제 불가능한 영역은 노력을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먼저 통제 가능한 영역과 불가능한 영역을 구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영역을 넘어서는 종교, 철학, 영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은 국가가 개입하여 (보험, 원조, 교육 등의 방법으로) 통제 불가능한 영역(전쟁, 병, 가난)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울한 감정은 어느 영역에 속해 있을까요? 통제 가능한가요? 불가능한가요? 정답은 둘 다에 속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는 통제가능한 영역의 우울함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2. 우울함

우울함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하여 논할 수 있습니다. "특수한 우울함" 과 "일반적인 우울함" 입니다.

2.1 특수한 우울함

먼저 특수한 우울함은 다시 상위단계와 하위단계로 나뉩니다.

2.1.1 특수한 우울함 - 상위단계

인간이 영적으로 고차원적인 단계에 도달하여, 내가 좋아했던 감각적인 것들, 예를 들어 커피, 골프등이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감각의 밤"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밤"이 시작되면 영적으로 우울해집니다. 이어서 "신앙의 밤"에 이르면 하느님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매우 고차원적인 단계고, 영적 가치가 무너집니다. 불교와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가 3년 전 성지순례로 방문하였던 스페인 아빌라 데레사의 책을 읽어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에 대한 동경, 순교와 가까워집니다. 심지어 성 프란치스코 성인도 2-3년 동안 영혼의 밤을 겪으셨습니다.

참고도서: 아빌라 데레사 "영혼의 성"

이 단계에서는 의사가 아니라 영적인 신학자가 필요합니다.

문답: 신앙의 밤은 냉담신자와 전혀 거리가 멉니다. 신앙의 밤은 오히려 신앙이 굉장히 깊어야 가능한 단계입니다.

일반적 우울증을 신앙의 밤으로 오해하고 성녀가 되려고 하는 것 등의 착각도 매우 위험합니다.

2.1.2 특수한 우울함 - 하위단계

병적으로 아픈 것, 트라우마나 큰 배반 등 특별한 상황, 외부의 영향에 의한 우울함의 단계에서는 의학적 치료가 필요합니다.

2.2 일반적인 우울함 (감정 안에서의 우울함)

오늘 저희는 이런 고차원적 우울함이 아니라, 일반적 중간단계의 우울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런 우울함의 원인은, 뭔가 만족을 못 해서, 각자 다른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과 질투심, 도달할 수 없는 기준 때문에 생깁니다. 무언가에 대한 큰 의지를 가질수록 그 우울함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울이 진행되면 슬퍼지고, 몸이 아프다못해 죽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2.3 아이들과 남자들은 왜 별로 우울하지 않을까요?

2.3.1 아이들은 우울단계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우울한 감정의 단계를 뛰어 넘어 바로 슬픔을 느낍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즉각적 반응을 합니다. 감정의 기복을 보인다는 것은, 감정의 중간의 단계가 없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울함의 단계에 도달하고 또 이를 견디는 것은 성숙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즉, 우울함은 성숙함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지 고민을 하고, 숙고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2.3.2. 남자들은 왜 우울하지 않을까?

남자들은 감정을 스캔하지 않고 바로 해결점(맥주?!)으로 건너뛰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문제해결 중심 사고로 인하여 중간, 감정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남자의 특성은 감정 중심 사고를 하는 여성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남자 철학자와 시인들이 섬세하면서 소위 말하는 여성적인 면모가 많습니다.

3. 일반적인 우울함의 두 형태

우울함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존재상실의 공포로 인한 우울함" 과 "스트레스에 의한 우울함"입니다.

3.1 존재상실의 공포, 고통으로 인한 우울함

어린이들이 부모님의 불행을 목격하거나 부모님을 잃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님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 일하시며 코피를 쏟으십니다.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쌀을 얻어 왔는데, 빗길에 넘어져 쌀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추운 겨울, 텅빈 종로 5가 지하도 아래 계단에서 바나나를 파는 할머니는 추위도 모르셨습니다.

미국 방송에서, 과속으로 판사 앞에 선 할아버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95세 할아버지가 65세 장애인 아들(my boy)을 평생 돌보시면서 응급 상황에 병원에 가느라 과속을 해야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상황.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바라볼 때, 제가 가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제가 그런 한계에 다다른적이 있는지 고민해봅니다. 여태까지는 그런 슬픔과 고통이 있는 우울함에 다다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울함은 정말 선택지가 없는 존재의 위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3.2 스트레스에 의한 우울함 =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짜증

직장에서 69시간 근무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일할 때 뭔가가 잘 안되면 짜증이 납니다. 대부분 존재의 흔들림에서가 아니라, 원하는 일이 안돼서 생겨나는 짜증입니다. 삶의 위협으로 우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4. 우리는 왜 우울함으로 많이 힘든가요?

우리는 불안 짜증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함을 존재에 의한 우울함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울함에 대해 읽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한 대목 발견하였는데, 엘리야 예언자께서 우물가에 있는 여인에게 가, 밥을 달라고 청합니다. 이 여인은 집에 가진 것이 얼마 없어, 집에 남아 있는 밀가루와 기름이 다 떨어지고 나면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언자에게 음식을 나누어드립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계속하여 밀가루와 기름이 생겨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7:12-16)

우리는 존재의 위기가 아닌데, 짜증나는 상황이 마치 존재의 위기인 것처럼 과장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병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은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과대망상을 합니다. 우리는 후천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것이 아닐까요? 펄벅 여사의 소설 대지를 읽으면, 아이를 낳은 산모(오란)가 탯줄을 직접 끊고, 팥알을 아이에게 먹인 후, 바로 밭을 매러 나갑니다.

감정이 지나치게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민자인 우리는 사실 강한 정신의 소유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천적으로 굉장히 약해져 있습니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여러가지 상황들이 우리를 더욱 약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약해져 있는 걸까?

왜냐면 여기 스위스에서는 한국에 비하여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옵션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 교육은 고통을 맞서는 방법이 아니라 피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책을 읽어도 건지는 것만 건지고, 이해할수 없는 것을 이해하거나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책 안의 모든 내용을 다 배우기 위해 간절하던 우리의 옛날 공부 자세가 여기에 부족합니다. 인내하고 도전하기 보다, 일이 잘 안되면 그냥 바꿔버립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언제나 대안이 있어서 잘 안 풀리면 쉽게 바꿔버립니다.

한국에서 자고 나란 우리가 이러한 사회 속에 살고 있고 이러한 배경은 우리를 굉장히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투사로서의 기질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약함이 코로나의 시대를 지나면서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6. 극복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함을 존재에 의한 우울함으로 착각하고, 환경적으로 나약해진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요?

이는 지성과 의지에 의하여 답할 수 있습니다.

6.1 지성은 (이성, 생각) 대상을 항상 자신에게 가지고 옵니다.

예를 들어, 자매님이 육아 고통을 얘기하면, 혼자 사는 형제님은 자신의 지식과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합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설명하면 내가 아는 선, 내 수준에서만 이해를 하고 습득하는 것이 지성입니다. 가령 천체물리학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도,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무엇에 대해서, 내가 아는 선에서 이해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6.2 의지는 (사랑) 그곳에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또는 무언가를 먹고 싶으면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됩니다. 의지가 있으면 그것을 느끼고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려고, 똑같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은 삼위일체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하나됨은 완전치 않고, 방향성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같다고 인식하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강한 대상을 사랑해야 강해집니다. 크고 위대해지라고, 어릴 때부터 어린이들이 위인전을 많이 읽듯이 말입니다.

7세기 갈루스 성인께서는 은퇴하려 했지만 교황님의 부탁으로 더 남아 더 많은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보니파시오와 성 프란치스코도 많은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6.3 강해진다는 것은?

지성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강한 대상" 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크고 강할수록 나도 크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강한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위대하고 크고 고귀한 존재를 사랑해야 합니다. 즉, 절대자를 사랑하고 그 존재와 하나가 되려고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해 알게 됩니다. 사랑은 앎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눈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눈이 떠집니다. (자녀가 참석한 학예회에서 자녀 모습만 눈에 보이듯이. 사랑이 있는 곳에 눈이 있다. 라틴어: Ubi amor ibi oculus) 즉,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절대적인 것 즉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강해지고, 따라서 우리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닌게 됩니다.

불교와 차이점: 불교에서는 감정을 제거하려고 하여 원하는 것이 없도록 만들지만, 천주교에서는 큰 존재를 사랑함으로써 감정의 동요를 극복합니다.

7. 우울함 극복 방법

7.1 선한행위의 영위

우리가 슬플 때는 좋은 것, 의미있는 일들을 하면 됩니다. 고귀한 목표를 가지고 투신할 때 우울함은 없어집니다. 엄청난 고통은 엄청난 은총이라고 합니다. 외로움을 겪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은총이고 행복입니다. 고통을 그냥 겪으면 무의미하지만 신앙 안에서 겪으면 의미가 생깁니다.

어떤 주교님이 유학 때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성탄 때 선행을 베풀며 외로움을 극복하셨습니다. 과거 한국의 독립군들 중에는 10대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우울할 틈이 없었습니다. 고귀한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 우울함의 치료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스위스에선 선한 행위를 할 기회를 찾는 것이 한국보다 힘들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숫자도 더 작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구걸을 하여 하루에 200프랑도 쉽게 벌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음 바로 직전의 이러한 게으름은 사회의 망조입니다.

7.2 삼위일체의 영위

세상의 근본 움직임은 삼위일체 내에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건강해지려면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고, 성부, 성자, 성령이 움직이듯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 찬미만 해선 안되고, 일도 해야 하고, 일만 하면 안되고 찬미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었으면 고해성사를 해야합니다. 이렇게 계속 돌아가야 정신적으로 건강해집니다. 온전히 열려 있으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7.3 소명의 영위

삼위일체가 인간을 만난 순간이 역사적으로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끝없이 내어주는 (하강) 모습 이후 상승이 일어났습니다.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도 하강이고, 고통을 겪고 십자가를 지신 것도 그렇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시는 것이 상승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강하는 운동에 동참할 때 비로소 상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지나가는 이 자동차를 붙잡아 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하강하기 위해서는 소명을 찾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시험을 하고, 실수를 해도 계속 해야 합니다. 끝까지 내려가야 끝까지 올라갑니다. 즉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움직임에서 이 중심을 잡는 것이 모든 건강의 핵심입니다. 즉 우리는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을 찾아야 합니다.

수도원 앞에 서 있는 나무는 참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수도자의 소명을 받아 들어오는 사람들, 그리고 떠나는 사람들...

하강을 하고 고통을 겪고 이를 견디지 않으면 "우울함"에 잠식 되고, "슬픔"의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슬픔이 끝나면 "절망"의 단계에 가고 이때 되면 "될데로 되라"가 됩니다. 이것은 생의 "끝"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기력"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8. 소명은 어떻게 찾나요?

라틴어로 소명은 보카치오 Vocatio. 소명은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8.1 소명을 찾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들어라 이스라엘" 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전례를 읽고 성서를 통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들립니다. 인생을 돌아보고, 주변인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하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찾게 됩니다.

내가 가장 기쁘고 잘할 수 있는 일, 바로 그것이 소명입니다.

8.2 공동체에 있어야 합니다.

소명은 혼자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수도자들은 순종합니다. obedire (latin: 향해 듣는다, 즉 순종한다) 은수자 역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은수자들도 그들끼리 모임이 있습니다. (한국: 까르투시오 수도원)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부딪히면서 피드백을 받아서 제 3자의 눈으로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공동체 안에서 소명을 찾게 됩니다. 즉 우리는 활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잘못된 요설, 사설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40년 넘게 선교 활동하신 한 신부님께서는 손수 쓰신 편지들을 일부러 기차에 두고 내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교회 밖 공동체에 대한 문답. 세상은 고귀하고 소중하게 창조되었으나 상처 입고 빛을 잃었고, 세상은 죄에 빠져 있고 사탄이 부귀영화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선교를 해야 합니다.

기타 질문: 공심제/공복제 - 거룩한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구분하여야 하므로 미사 전에 식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