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론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논합니다. 어리석음은 사추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총명함과 대칭관계에 있는 악덕입니다. 어리석음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아둔함입니다. 아둔한 사람은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모르고, 일을 처리하더라도 오히려 엉망으로 합니다. 정신이 흐리멍텅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이 색(色)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감각적 만족에 대한 큰 관심은 정신을 흐리게 만듭니다. 정신이 흐리니 일처리가 원만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다른 종류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간교함입니다. 이 아둔한 사람과는 달리 부지런하게 움직여 일처리를 잘 하면서 능력을 과시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사람은 자기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혼자 잘난 줄 아는, 간교한 어리석음의 원인을 토마스는 ‘인색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금단의 열매를 바라보니까 그것이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고 합니다. 감각적 황홀함, 색이 그녀의 오감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후 그 열매가 그녀를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럽게 보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심지어는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간교함이 동하는 겁니다. 결국 하와는 이 욕망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먹고 남편에게도 건네주어 둘 다 어리석게 됩니다. 그 결과 눈이 어두워지고, 본인들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제는 그들의 육체에만 시선을 돌려 부끄러워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인류의 타락은 어리석음에 빠지는 형식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런 타락을 우리는 원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원죄는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입니다. 즉 우리의 본 모습에 어떤 죄악이 더해져 그것이 우리에게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본래 있어야 할 그 모습에 어떤 한 부분이 결핍된 상태가 되어 그것이 전달되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연대보증을 통해 새로 생긴 빚이 자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부도가 난 상황, 즉 있어야 할 재산을 잃어 그 가난이 물려지는 모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난해진, 부서진 인간의 모습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요? 있습니다. 충만하고 온전한 인간을 만나고 그와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분과 하나가 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유혹자는, 이제는, 그리스도께 접근하고,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 온전함에 흠집을 내려 합니다. 색과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에 빠트려 어리석게 만들려는 겁니다. 물론 실패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악마는 이제 조용히 있나요? 아닙니다. 여전히 부지런히 사람들을 힘과 권력, 재물과 쾌락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유혹에 넘어갑니다.

‘부탄’이라는 나라를 아시나요? 행복도 조사를 하면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인터넷을 보니까 이 나라가 7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고 하더군요. 나라 자체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합니다. 변한 게 있다면 그 사이 부탄에 인터넷이 보급되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즐기며 사는지를 보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화려함에 넘어가 행복하던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로 변한 겁니다. 에덴과도 같았던 그 곳이 이제는 탈출하고 싶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특별한 방법을 알고, 또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라고 왜 세상 좋은 것들 다 갖고 즐기고, 보란 듯이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유혹이 들 때 저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유혹들이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통합니다. 여러분도 유혹에 빠질 것 같으면 한 번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유혹의 극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하느님이 나서실 겁니다.

어머니가 젊으셨을 때였습니다. 주일인데 겨울이라 날씨가 춥고 눈도 내려 미사에 가지 않고 따뜻한 방에서 누워 계셔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온 힘을 다해 따귀를 때리기에 놀라 일어나시니 방에는 어머니 말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말로 볼이 아프셨다고 합니다. 시계를 보니 미사가 시작될 즈음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성당에 가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 항상 주일을 지키셨습니다. 감사하는 방법으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이 나서시면 아픔이 따를 겁니다. 감사하거나, 아니면 맞아서 유혹을 이겨내거나. 구약에서 야곱은 하느님께 맞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표식을 가지고 살게 되지만 평생 다리를 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저라면 첫 번째 방법을 택할 겁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