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카드가 많이 도착하는 시기입니다 어제도 우편물이 몇 개 와 있더군요. 그 중 하나는 세무서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성탄 전날 세금고지서를 받으니 그리 신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지난 해 52.80프랑의 세금을 덜 냈으니 1월 9일까지 납부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로고스입니다. 정확히 내용을 전달하고 요구합니다. 사실 이런 명료함이 없다면 국가가 운영될 수 없겠죠. 과학도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혜택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합니다. 한 천재적인 물리학자가 세상의 모든 물리법칙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아주 명료한 공식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집에 가는데 마침 그 날이 결혼기념일이라 꽃가게에 들릅니다. 그곳에서 아내에게 선물할 꽃을 사려고 하는데 고민에 빠집니다. 어떤 색의 장미를 선물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는 너무 외로워 보일 것 같고 한 다발은 너무 무거워 보일 것 같고 흰 색이 좋을지 아니면 빨간 색이 좋을지 도대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이 순간 그가 추구하고 발견한 명료함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또 같은 날 저녁 그의 아들이 진로에 관한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에게 묻는 겁니다. 이 순간에도 이 천재적인 물리학자는 명료한 답을 찾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정말 중요한 건 명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것들은 추상적입니다.

명료함보다 더 깊은 곳에 추상의 영역이 있습니다. 논리 이전에는 직관이 있듯이 말입니다. 언어 이전에 그것의 그림이 우리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듯이 언어가 감정을 다 담아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고귀한 것들은 언제나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언어를 깨뜨려 숨겨진 것을 드려내려 안간힘을 씁니다. 화가는 그가 본 것을 캔버스에 온전히 담아 내려하지만 그럴 수 없어 광기에 빠집니다. 도식화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의 표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것은 이 명료한 표면을 깨뜨리고 들어가 고귀한 그분의 모습을 바라볼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그 모습은 고귀하기에 그래서 명료하지 않기에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탄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고 감탄하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그 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의 로고스를 바라보고 감탄할 때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우리가 좋은 그림과 음악을 감상하면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부한 이는 그 명료한 지식과 하나가 되지만 그분을 바라보고 감탄할 수 있는 이는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로고스의 리듬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장 훌륭히 해 내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당연합니다. 그 누가 어머니보다 더 아들을 자세히 바라 볼 수 있겠습니까? 감탄할 수 있겠습니? 누가 어머니보다 더 아들의 삶에 온전히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불협화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망가진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로고스의 무한한 화음이 우리의 불협화음을 품어 안아서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이전의 삶이 그대로 유지되지만 새로운 삶으로 탄생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는 찾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처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마 이 모든 얘기가 추상적으로 들리실 겁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귀한 것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