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목자이자 도살자’의 배경이 된 사건이 있습니다. 198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어떤 젊은이가 7명의 사람들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범행을 저지른 이는 사형 집행을 담당하는 간수였습니다. 사람들은 죄수의 사형 집행을 밥 먹듯 하던 이라 살인도 서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변호사가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범인의 삶이 더욱 자세하게 조명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집행할 뿐만 아니라 사형수들을 돌보는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편지를 전해주고 글을 모르는 죄수들의 말을 받아 적어 가족들에게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싸우면 말리고 아프면 약도 챙겨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 사이에 신뢰와 정도 커져 우정이 싹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명령을 받아 그가 돌보았던 사형수들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게 그의 일이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이 현실로 인한 트라우마가 그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변호사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재판장에게 말합니다: “그 누구도 목자이면서 도살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럴 수 없을까요? 우리 인격의 스팩트럼이 지닌 한계 때문입니다. 이 스팩트럼이 180도까지 벌어진 상태가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방수가 방화범이 될 수 없습니다. 경찰이 도둑이 될 수 없습니다. 변호사가 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목자가 도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래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제도 때로는 냉정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후 다시 본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역할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때로는 아이에게 매를 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회사의 일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상반되는 두 가지 인격을 동시에 지니는 것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두 인격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광기에 사로 잡혔을 때 가능합니다. 얼마 전 독일에서 한 남자 간호사가 수십 명의 사람들을 약물로 살해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안에 상반된 인격이 동시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혹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요? 인간이 하느님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생존 당시 수많은 이들이 그를 추종했고 심지어는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일종의 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종교인들에게는 큰 유혹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갇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삶을 선택합니다. 제 3차 유대전쟁의 영웅 바르코크바처럼 아키바 랍비의 도움을 받아 메시아로 칭해지는 실수를 범하지 않습니다. 이 요한을 주님은 여인들 가운데 태어난 이들 중 가장 높은 이라 칭송하십니다.

인간의 인격은 완전한 양극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인물로 살아야 할지 결정한 후 지속적으로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광인만이 두 인격을 살아갑니다. 물론 이런 삶은 삶이라 할 수 없을 겁니다. 사실 오직 한 분만이 완전한 인격의 양극을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