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빕니다.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의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실제로 수도자, 성직자 등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이제는 나 자신을 찾아갈 시간이다.” 라고 말을 하며 조용한 곳을 찾아 시간을 갖습니다. 제가 1996년 수도원에 간 뒤로 ‘나 자신을 찾아갈 시간이다.’ 말을 하며 시간을 갖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제대로 찾은 사람들은 못지 못했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야기 하는 것이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복음에서 성전 안, 앞에 앉아 기도하는 바리사이는 자신을 모르고 있고 뒤에 앉은 세리는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찾는 길에 대해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합니다.

어떤 종교나 사회가 그 종교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행동양식, 음식, 의복 등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슬람이 그 대표적인 예이죠. 이슬람에서 규정하는 음식을 ‘할랄’ 이라고 합니다. 저도 비행기에서 할랄 음식을 시켜서 먹은 적이 있는데, 기내식이 좋지 않은 경우 할랄을 시키면 양질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짐승을 도축하는 과정에서부터 조리 과정까지 세세히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맛이 괜찮습니다. 이슬람 여성들의 의복의 경우 히잡을 쓰고 때로는 브루카를 쓰도록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하루 5 회에 메카를 향해 하도록 시간과 양식을 다 정해 놓았습니다.

유대교에도 기도 방식, 쉬는 방식 그리고 요리 방식들이 다 정해져 있습니다. 복음에 나와 있듯이 바리새이들은 맨 앞에 앉고 세리들은 뒤에 앉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성전 밖에 있도록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도 우리의 언어를 보면, 예를 들어 오빠, 언니, 누나 등 하나의 사회의 약속이 정해져 있고 규정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지킬 때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 받습니다.

이런 행동 규정이 섬세하게 꼼꼼히 정해져 있는 반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정부가 무능할 경우 혼란이 생기고 무정부 상태가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교는 어떤가요? ‘그리스도 인은 어떤 특별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라는 것이 정해져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다 먹습니다. 의복 규정이 있나요? 없습니다. 저는 미사 중이라서 이런 미사복을 입지만 급한 경우에 영대만 해도 가능합니다. 자리의 규정이 있나요? ‘누구만 앞에 앉을 수 있다.’ 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뒤에 앉고 싶은 사람은 뒤에 앉고 앞에 앉고 싶은 사람은 앞에 앉을 수 있습니다. 단식 규정이 있지만 필요시 빠질 수 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큰 행사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규정이 있어도 제약을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교는 이성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교는 인간 안에 올바른 판단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 하여 스스로 올바른 길을 가도록 요구하고 북돋워 줍니다.

왜 그리스도교는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을 신뢰할까요? 하느님은 로고스 (λόγος, logos) 이시고 우리가 로고스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리 안의 이성은 거룩한 것입니다. 이성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찾아갈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 많은 규정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혼란 속에 살도록 허락한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찾아가라고 요구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로 인구의 약 2/3는 철저히 규제하는 압박 속에 혹은 혼돈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오늘날 이 거룩한 이성도 위기에 빠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념들이 나타나고 있거나 아니면 혼란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우리 복사 어린이들과 스페인에 비행기를 타고 피정을 가려고 계획을 하니 어떤 분이 ‘어떻게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고, ‘환경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비판을 하였습니다.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고 우리는 행동을 제약 받습니다. 또한 고기를 먹으면 안되고 채식을 해야 한다고 강요를 하기도 합니다.

한편 혼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오늘날 사회 속에서 마약을 허용하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언젠가 사라지겠지.’ 생각만 하며 못 본 척 합니다. 이러면서 많은 여성과 남성들, 젊은 친구들의 삶은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을 지켜내야 합니다. 로고스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지 못할까요? 나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고, 하느님을 만나러 간다.’ 결심을 하고 주님께 나아가 그 분을 흠숭할 때에 로고스를 찾게 되고, 로고스를 찾을 때 주님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거룩한 이성을 잘 관리하시고 주어진 자유를 기쁘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참고: 오늘 복음은 매일미사에 나오는 부분이 아니라, 독일어 전례력(C)을 기준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