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올해는 추석이 빠르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여름이 끝나자마자 추석이 다가왔는데 저는 추석인 줄도 몰랐습니다.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추석 인사들을 보고 추석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제가 일하는 성당에서 견진 받는 청년들과 디센티스에 있는 한 수도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수도원에 가는 길에 잘못 길을 들어서 Andermatt 으로 들어섰고 알펜파스를 지나 2시간이면 갈 길을 3시간 넘게 걸려 갔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화창한 날씨 속에서 운전을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편 가는 길이 급해서 운전도 잘 못하는 제가 알펜파스에서 독일 차를 2대나 추월하며 빠른 속도로 달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이 참 아름답지만 동시에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위험을 잊고 자연 안으로 갑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어린양 같이 말입니다. 어린 양은 풀밭에서 뛰어놀다가 향기로운 풀 냄새에 끌려, 그리고 재미도 나니 무리를 떠나 숲깊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숲에는 늑대가 있기 마련이죠. 어쩌면 잡아먹힐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 속에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을 벗어나 문명 속에, 보호된 공간 속에, 그리고 질서와 문화가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앞서 계신 조상들은 그리스도교 문화가 머무는 문명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문명의 이러한 안전한 공간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길을 잃어버린 우리를 안전한 공간으로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에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제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제가 그 디센티스 수도원에 머물면서 새로이 느낀 점은 수도원에 온 손님들이 기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식사 전에 일부러 큰소리로 기도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축복 하였습니다. 이 식사를 위해서 누군가가 희생을 하였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은 문명화된 우리의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입입니다. 밥 먹기 전에‚ Guten Appetit’(맛있게 드세요) 이러고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누구나 다 식욕은 있기 마련입니다.

집에서 보면 아이들도 문명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여름에 밖에 다니다 보면 자매들이 헐벗고 다녀 민망합니다. 남녀가 좋으면 그냥 같이 삽니다. 결혼은 하지 않고요. 식사 때 기도를 하지 않고 아이들을 그냥 자연스럽게 키우고 남녀는 혼인 없이 그냥 사는 모습이 문명화 된 모습일까요? 이것은 위험합니다.

먹기 전에 기도를 하고, 명확한 가정교육을 하고, 입는 방식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우리를 옭아매는 억압의 도구가 아닌 우리를 보호하는 문명입니다.

여러분들은 문명화 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어린양처럼 자연이 좋아 깊은 숲에 들어갔다가 늑대가 다가오는 줄 모른 채 위험에 처해 계신가요?

우리는 문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지켜내야 합니다. 중국을 보십시오. 수천년 동안 훌륭한 문명을 자랑했지만 문화 혁명 이후 50 여년이 지난 현재, 망가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중국에서는 흔히 남자들이 더우면 윗통을 벗은 채 돌아다니곤 합니다. 이것이 문명화된 것처럼 느끼시나요 아니면 원시적으로 느끼시나요? 수천년 동안 이루어진 문명이 무너지는 것은 삽시간입니다.

한가위, 얼마나 소중한 조국의 문화입니까.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문화,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 소중한 문화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킵시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늑대가 와서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아멘.


식사 전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