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시작에 지혜는 한 차원 이전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 지혜는 흔히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생생한 힘이고 일깨움을 전달해주는 거룩한 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거행하면서 거대한 드라마를 거행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학부 4학년 때 삼위일체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외우라는 대로 외우면서 과정을 마친 후에 그 지식을 가지고 독일로 유학을 왔었습니다. 그 정도로 삼위일체는 어려운 개념입니다. 하물며 신자들에게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삼위일체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고 본성은 하나이시며 세 개의 서로 다른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그 개념에 어떻게 다가갈까요? 아직까지도 모르지만 ‘인격’이라는 개념, 그리고 ‘본성’ 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삼위 일체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삼위 일체는 현실에서 제일 상위 개념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의 지혜이며 신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신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다가가는 것’ 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거행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거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죽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관 안으로 들어가시거나 태워질 것이고 이렇게 단 위에 서서 말하는 저 역시 마지막 숨을 쉬고 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느님이 허락하시면 천국에 가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천국은 사실은 3위 1체의 다른 표현입니다. 천국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 삼위 일체 안으로 들어가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지옥도 실재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없으면 그것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끝내 성공을 하여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1독서 끝에 보면 지혜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뛰어 논다고 합니다. ‘논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 중 제일 차원이 높은 행위입니다. 걱정이 없는 상태이고 이미 행위 안에 목적이 이루어지는 고차원적인 행위입니다. 죽음을 지나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뛰어 논다면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 미래, 그리고 천국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관건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천국에 가나?” 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독일에 재교육을 위해 500km 떨어진 곳을 갔다가 새벽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막아 놓았더군요. 어디 길을 따로 열어 놓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막아 놨던 것입니다. 바젤(Basel) 들어가기 전에 아이켄(Eiken)에서 고속도로를 막아 놨는데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앞에 있는 차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고 앞에 차를 보니 취리히 번호판을 갖고 있길래 ‘이 차를 따라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 앞에 있던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다리를 건너고 루체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저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산을 건너니 고속도로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멋지게 달려서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앞에 차를 몰던 사람은 저를 도와줬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구원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고속도로 안에서 달린다 생각해보세요. 그 때 예수님만 따라가가면 됩니다. 성령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길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고속도로에서 깜깜하게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에 이르는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체성사이며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멘.


삼위일체

성체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