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말은 어디까지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소리 뒤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생각이 만들어지고, 이 생각이 언어로 표현됩니다. 그러하니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말을 알아들은 게 아닙니다. 그 이면에 있는 그림을 공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알아들은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넘어서 그 이면에 있는 그림에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있을까요? 달리 묻자면, 주님의 목소리 이면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는지요? 그 그림을 보셨다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으신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 그림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영혼 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림으로 말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듯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 너머에, 그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을 바라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머니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이를 낳는다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자녀들의 영혼 안에 영원한 그림으로 새겨진다는 겁니다. 주님 안에 성모님께서 깊게 각인되셨듯이 말입니다.

단, 성모님은 주님의 인격 안에 당신의 모습을 새겨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새겨 넣으셨습니다. 당신의 순종과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말입니다.

여러분도 자녀들 안에 여러분의 모습을 그려 넣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희생에서 흘러나온 그 눈물과 피로 십자가를 그려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심장에 가시관을 씌워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알 수 있는 그 심장을 주셔야 합니다. 그 심장을 지닌 영혼만이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거쳐 부활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 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삶을 새겨 넣으실 때, 바로 그 때 진정한 의미에서 어머니라고,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을 겁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과연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성모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참된 어머니 성모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아멘.

[첨언]

그 먼 곳에서부터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를 통해 우리가 모르는 우리 안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십니다. 이것이 양극성 입니다. 그 먼 곳에서 오신 분이 우리 안 깊은 곳이 들어오신 것이죠. 주님의 엄청난 이 여행에 동참합시다. 우리가 과연 성체를 모시는 합당한 존재인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시다. 우리의 깊은 곳으로 주님의 여행에 동반할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