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사순 시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부활을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항상 느끼는 것은 사순 시기를 준비하느라 몸이 힘들어도, 전례를 준비할 수록 부활의 은총이 더욱 커지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시기를 되돌아보시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시고 다가오는 부활을 열정으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보통 저는 강론을 짧게 합니다. 한국의 신부님들은 30분도 넘게 하는데 저는 10분 정도 합니다. 여러분은 은총을 받으신 것이죠. 그런데 오늘은 조금 길게 하겠습니다. 오늘 들으시는 내용은 여러분들에게 피와 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죽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날 장례식을 치를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장례식 준비와 관련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된 80세의 할머니께서 서럽게 울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경우는 많지 않고 특히 스위스에서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프로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위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할머니께서 계속 울다가 제가 2분 정도 이야기하고 나니 울음을 뚝 그치고 “이제 끝이다. 이 사람은 죽었고 그에겐 어둠만이 있고 이제 끝이다.” 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속으로 당황하였지만 침착히 진정하시라고 위로를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비슷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최소 5명의 여성들이 그 소식을 전달하지만 제자들에게는 그것을 헛소리로 들렸고 사도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할머니 과부와 이 제자들은 왜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았을까요? 왜 이럴까요?

다시는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혹시 믿었다가 다시 실망하면 너무 아프니 차라리 죽으면 끝이라고 믿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퍼하는 것이 실망하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잘 슬퍼한다면 마음이 진정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망은 참 아픕니다. 그래서 실망을 야기하는 희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마음은 슬프지만 그래도 실망보다는 더 견디기 쉬우니까요. 그냥 희망 자체를 제거하고 ‘죽은 남편은 그냥 끝이다.’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부활 따위는 없다.’ 고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기제입니다. 여러분은 실망을 할 용기가 있는지요?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지실 의지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쭉 슬프고 그냥 그대로 편안한 상태로 머무르려고 하시나요?

세상은 우리에게 이런 유혹을 줍니다. ‘기대하지 마. 너만 다쳐.’ 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을 강하게 하고 실망을 할 것 같아도 각오를 하고 희망을 갖는 삶이 그리스도 안의 삶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다시 일어납니다. 베드로에게는 실망을 견딜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을 이끄는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살아오면서 많이 경험하셨을 줄 압니다. 실망을 할 테니 기대 자체를 하지 말고 살라고, 위로를 가장한 유혹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혼을 크고 강하게 할 수 있을까요? 비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의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막 뛰어갑니다. 둘이 손 잡고 사이 좋게 간 것이 아니라, 요한은 빨리 뛰고 베드로는 그 뒤를 쫓아갑니다. 있는 힘껏 무덤까지 도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하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있으면 힘든 것도 모른 채 힘껏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갈 수 있습니다. 엄마 찾아 삼만리 아시죠? 삼만리는 14,000 km 입니다. 마르코가 사랑하는 엄마를 찾으러 이탈리아를 떠나 그 먼 아르헨티나로 가고 그 곳에서 아픈 엄마를 병수발을 하며 건강해지게 하여서 다시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까지 모셔 옵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있는 지점까지 우리 영혼은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영원에 있다면 우리의 영혼도 영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자주 아프고 우울증에 겪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영원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여기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약해진 것입니다. 영혼은 운동해야 합니다. 영혼은 멀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영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운동을 해야 좋아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양극성 안에서 살아갈 때 영혼이 강해지고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저는 항상 기쁘고 건강합니다. 물론 알레르기로 조금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요. 왜 그럴까요? 저는 저 먼 곳을 생각하면 힘이 넘치고 살아납니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운동을 하면 강해지고, 강력한 영혼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실망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주변 스위스 친구들은 자주 아프고 우울증에 걸릴까요? 먼 곳, 영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카톨릭 신자들은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맙시다. 슬퍼하고 실망하더라도 실망할 준비를 하고 더 큰 희망을 가지고 영혼을 먼 곳으로 갔다가 오도록 운동을 시킵시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강한 영혼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훈련된 강한 영혼만이 죽은 후에 살아납니다. 다른 영혼들은 소멸될 것입니다. 강한 영혼만이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 강한 모습으로 죽은 후에 만납시다. 아멘.

[첨언]

그 먼 곳에서부터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를 통해 우리가 모르는 우리 안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십니다. 이것이 양극성 입니다. 그 먼 곳에서 오신 분이 우리 안 깊은 곳이 들어오신 것이죠. 주님의 엄청난 이 여행에 동참합시다. 우리가 과연 성체를 모시는 합당한 존재인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시다. 우리의 깊은 곳으로 주님의 여행에 동반할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