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평화를 빕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왔듯이 우리들의 말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말을 통해 평가가 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나옵니다.

저는 버릇이 하나 있는데 꽃을 항상 바라봅니다. 제가 심한 알레르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강아지풀에 대해 알레르기가 심합니다. 어느 날 미사를 드리는데 미사 중에 너무 알레르기 증세가 심했습니다. 알고 보니 제대 앞에 꽃 봉사하시는 자매님이 강아지 풀을 잔뜩 장식 해 놓았더군요. 이것도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알레르기 없이 잘 지내고 계신지요? 휴가를 마치셨을 텐데 잘 지내셨는지요?

우리가 평소에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때가 되면 혹은 어떠한 상태로 있게 되면 우리 각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내면에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요? 여러분들은 알고 계실 줄을 압니다.

여러분 내면에 있는 ‘그 무엇’이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드는데, 현대 문화는 그 불편함을 잊을 수 있는 요소들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술, 마약 등이 있죠. 그들은 무한정 제공을 합니다.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게 정상인데 현대 문화는 그것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 불편함을 잊고 살게 합니다.

그 불편함에 대한 또 다른 해결책의 하나는 소위 ‘치유자’를 찾으러 가게 합니다.

제가 어느 날 TV 프로를 보고 있었는데 그 프로가 끝난 후에 유튜브 채널에서 어떤 할머니가 무지개 색 옷을 입고 ‘마음이 힘들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광고를 하더군요. 스위스에서는 이와 같은 ‘스위스 무당’들이 굉장히 성행을 하고 있는데 많은 이들은 그 사람들을 찾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에 티가 있어서 불편함을 느낄 때 티를 빼주는 것이 아니라 눈을 빼버립니다. 영혼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에 아픈 것 조차 모르게 됩니다.

한편 우리는 한국 문화 속에서 불교 문화가 있습니다. 인간은 고통에 이르고 고행을 하다 보면 도에 이른다는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 ‘멸(滅)’은 자기를 소멸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예 자기를 없애 버리는 것이죠. 스님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고생을 하기 때문에 자기 선에서 끊어버리는 의미로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눈 속의 티를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를 개발하고 제공하며 우리는 그것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 안에 티를 갖고 있지 않고, 실상 들보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네 안에 있는 것은 들보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들보를 갖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스위스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남자가 외도를 하거나 바람을 피우는 경우를 보며 ‘그럴 수도 있지, 새롭게 시작하면 되지.’ 라고 서로 봐줍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합니다. 법적으로 합리화를 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낙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우리를 보신다면 얼마나 웃길까요? 서로 엄청 큰 들보를 갖고 있으면서 서로 정상이라고 인정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이 사회에서 고립되고 싶으시면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우리 문화는 죄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문화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과거에 동네에서 젊은이가 부모님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있다면 동네 어른들로부터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과거에 지하철에 탔는데 지하철 경로석에 3 명의 젊은 남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어느 지하철 역에서 할머니가 지하철에 타셨는데, 젊은이들이 양보하지 않고 계속 자리에 앉아 있자 옆에 있던 아주머니께서 이 젊은이들을 혼내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부끄러워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들보 있는 사람에게 들보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 들보로 막 때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문화가 힘들면 여러분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편하면 들보를 쓰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우리는 지금 사순절 전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오는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의 시작으로 사순 시기가 시작됩니다. 특별히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있는 들보를 들여다 봅시다. 그 들보는 워낙 커서 자신이 뺄 수 있습니다. 그 들보를 빼서 목수이신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이 그 나무로 된 들보를 고쳐서 여러분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사실 그 들보는 우리에게 주어진 큰 은총이었는데 이것이 들보가 되어 우리 눈 안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숫자 계산에 능한 재능 혹은 은총을 잘못 사용하여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들보를 빼내어 예수님께 드립시다. 주님이 새로이 고쳐서 주십니다.

사순 시기 잘 시작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