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오늘 연말 달리기 행사로 늦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교통이 막혀 차 안에서 30분 넘게 오면서 화가 나는 저를 돌이켜 보면서 ‘이 세상에서 사제로 사는 것이 쉽지 않구나.’를 느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옛날 시절 신부님들은 윽박지르고 성격이 있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여기도 그랬다고 합니다. 과거에 사제들이 고압적으로 다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제들은 고압적으로 다루지 않고 신자들에게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오늘날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새로운 고압적인 사제들을 봅니다. 그러한 사제들은 성당에서 일하지 않고 정치권에서 일합니다.

지난 2년간 정치인들의 모습을 여러분들은 관찰해 보셨는지요? 유럽연합이나 독일, 스위스 의회에서 정치인들이 연설하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마치 선생님이 아이들을 훈계하듯이 연설합니다. 굉장히 낯선 모습입니다. 정치인들은 윤리적인 주제들을 시민들에게 요구합니다. 환경을 보호해야하고, 북극곰을 보호해야 하고, 고기를 먹으면 안되고, 인종 차별을 하면 안되고, 난민을 구해야 하고 등등 말입니다.

이 정치인들이 이야기 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라는 말입니다. 전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떤 것을 해야할 것을 강요하고 개인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인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이루어 낸 인류의 가장 큰 유산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하느님이 한 인간으로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개개인을 자녀로 맞으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근간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정치에서는 “우리 모두가” 윤리적인 이상향을 다같이 해야 한다고 고압적으로 말하고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배제시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개인을 잃어버리고 군중 중에 한 존재로, 여럿 가운데 하나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그래서 개인이 되고 싶습니다. 개인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새길 수 있는 것은 이 개인에 대한 크나큰 동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군중이 묻자 너희 모두는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옷을 두벌 가진 사람은 없는 자에게 한 벌 나눠주고, 군인들은 강탈하지 말고 세리들은 받아야 할 것만 받고.. 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한이 개인에게 초점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정 안에서 남편으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혹은 사제로 잘 지내면서 여유가 되시면 정치인들이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나가서 좋은 일을 하면서 가정이 불행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80년 혹은 100년을 살다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하느님께서 너는 무엇을 하고 살았냐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저에게는 “너는 취리히 가톨릭 신자들을 잘 돌봐주었냐?”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혹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 그 안에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살 때 마음의 짐도 몸의 짐도 가벼워집니다. 지구를 구하기 전에 먼저 가정을 돌봅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