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개신교 신자들과 얘기할 때 종종 “구원 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듣습니다. 침례교나 성결교를 비롯한 많은 교파들이 세례를 강조합니다. 세례와 구원을 동일시 할 정도로 말입니다. 따라서 세례 후의 인간은 거듭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받아들여집니다. 한편 루터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그도 세례의 중요성은 인정했지만, 세례를 받아도 자유가 없어 욕망의 세계에서 헤맨다고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중간 정도의 입장을 고수합니다: 인간은 세례를 통해 원죄로부터 거듭나지만 죄의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결정적 상처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원죄를 벗어나지만 그 상처를 간직하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 듣는 제1독서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이것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죄로 물든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하느님은 대홍수를 내리십니다. 노아와 가족은 방주 덕에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그들만 살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몇몇 ‘들짐승’들도 목숨을 건졌던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 복음 역시 흡사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사막으로 가십니다. 하지만 혼자 생활하시지 않습니다. 복음은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다.”고 말합니다. 거듭 태어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실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 안에서 동물적인 습성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면의 수성(獸性)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냥 그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얼마 전 취리히에 다녀왔습니다. 식당들은 문을 닫았는데 마리화나를 파는 상점은 문을 열고 운영하더군요. 한껏 욕망을 즐기는 시대의 현주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둘째, 금욕적인 삶입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가능합니다. 단 세속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비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세번째가 우리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조련사의 길입니다. 사자와 호랑이를 다루는 조련사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녀석들이 선생님 앞에서는 개, 고양이처럼 얌전한가요?”라고 기자가 묻더군요. “게임의 규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만 가르쳐 주면 됩니다.” 욕망이 설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그것을 완전히 자제하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그것과 대화하면서 규칙을 정하고 그에 따른 보상과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이 사회적, 개인적 훈련의 과정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릅니다. 또 이것을 익힌 이를 두고 “교양 있다.”고 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순시기는 우리의 욕망을 마주보고 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결국 문화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생각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주일에 한 잔 정도 하는 것으로 스스로와 약속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교양을 갖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