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번에 행사가 없이 단촐하게 추석 명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주님께 감사하여야겠고 생명 그리고 영적 은혜를 주신 부모님들, 조상들께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감사는 어떻게 드릴까요? 세상이, 남들이 공평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먼저 공평하도록 해야 겠습니다. 태어나서 이 자리까지 부모님께 원망의 마음은 없었는지요? ‘난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을까? 남이 받는 혜택은 왜 나는 받지 못할까?’ 등등 말입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출발은 누구나 다 똑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어떤 것을 이루었고 그 중 큰 부분은 부모님의 덕이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사라는 양식을 통해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집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들의 원천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의 문화이고 두번째는 기억 상실의 문화입니다. 죽음의 문화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생명체를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낙태)

두번째로 우리는 상실의 문화의 영향을 받고 스위스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조상님의 덕을 누리고 있는데 그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제로서 저는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빨리 끝내고 커피 한잔 마시고 가려고 할 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현재 Pandemie(판데믹)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시기를 풍성하게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후에는 이렇게 미사를 거행하는 것조차 사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꾸준히 조상의 은덕을 기억합니다. 모든 인류의 공통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사는 정신적인 면도 있으나 수확의 실제 일부를 나누어 먹기도 하고 태워버리기도 합니다. 수확의 일부를 태우기보다는 우리가 먹고 재산으로 쌓아두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태우는 것은 우리의 일부를 포기하고 조상을 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포기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나옵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것으로 정신적인 것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포기도 의미힙니다.

저는 최근에 Steuererklärung(연말 세금 정산)을 하였는데 이렇게 많이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 속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집착하는 저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자기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 이렇게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미노 피자 설립자는 고아였고 어렸을 적 수녀님들이 키워주었는데, 도미노 피자 회사를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 날 큰 뉘우침을 통해 결심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수십조의 재산을 교회를 위해 쓰도록 바쳤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재산이 없어져서 파산하는 순간이 자신의 영광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Liebherr 회사의 주인은 어느 날 사고를 당했고 우연히 경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큰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로 가서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부인과 자식들이 살 돈을 제외한 나머지를 포기하였습니다. (관련기사)

포기는 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위해 재화를 모으며 동시에 하느님께 인색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은근히 그리스도의 가치를 정신화 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특히 가톨릭 신자들 상당수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부모님들은 우리를 위해 정신적으로만 희생했는지요? 그것은 아닙니다. 실재적인 포기가 있었고 언젠가 죽을 우리도 구체적인 포기 행위를 할 것입니다.

교무금뿐만 아니라 이웃과 국가를 위해 우리를 포기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병원의 3분의 1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생겼습니다. 생명을 위해 일하는 것은 구체적인 신앙의 행동입니다. 부모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여야 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