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져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는 분 중에 채무를 진 분이 계십니다. 그 분에 따르면‚ 채무자로서의 삶은 삶을 사는 게 아니다.’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공포감이 큽니다.

금전의 빚은 아니더라도 살면서 진 빚이 있습니다. 바로 영혼의 빚입니다. 죄인인 이상 항상 갖고 있습니다. 주님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시는 채권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는 어쩌면 몰래 숨어 있는 죄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하기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15 집회 이후에 우리 나라는 어려운 시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 대규모 집회에 대해 사과를 한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에 대해 뉘우치지 않았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위기같이 어려운 시기에 파업을 한 의사들 중에 사과를 한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뉘우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가운데 죄인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짧은 인생 가운데 영혼에 빚진 분에게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용서를 구해야겠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 자벨카 신부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미국의 군종 신부로 계신 분이었고 파일럿들을 대상으로 사목하셨습니다. 그 신부님이 사목하신 파일럿들은 주로 아일랜드 출신의 카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상당 수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원폭 투하 임무를 위한 비행 출발 전에 신부님이 파일럿들의 고해성사도 해주시고 비행기 및 원자탄 무기들도 축복하셨습니다. 현재는 개정된 종교법에 의해 무기는 축복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돌아왔을 때 환영식도 하였습니다. 감사기도도 드렸습니다.

그 중 일부 파일럿들은 폭탄 투하 후 사진을 촬영해서 돌아왔습니다. 그 사진을 본 신부님은 매우 놀랐습니다. 모든 것이 없어져 폐허로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과연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이것이 과연 옳은 행동이었나?’ 자문하였고 고백성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고백을 하시고 훈계도 들으셨습니다.

고백사제께서 “자벨카 신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벨카 신부님은 스스로 놀랐습니다. ‘25 만명을 죽인 임무에 자신이 투입이 되었는데 이렇게 쉽게 사죄경을 받다니..’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가능합니다.

하느님의 그릇은 인간의 그릇과 다릅니다. 뉘우치면 용서해주십니다. 숨이 붙어 있을 때 뉘우칩시다. 일반 신자가 생각하는 것들은 실상 큰 죄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면 무한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한할까요?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기꺼이 용서를 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뒷부분에는 임금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임금님은 자기의 종을 벌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종은 ‘용서’라는 것의 가치를 모르고 그냥 이용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은 은총을 그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해줬을 때 그가 용서를 ‘이용’하면 자비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비와 정의의 관계를 설명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혼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큰 자비를 베푸시되 그 자비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의에 호소하십시오. 아멘.